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심 베이강 (문단 편집) === 비시 프랑스 시기 === 1940년 7월 비시 정권이 수립되었다. 베이강은 9월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이후에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베이강은 그곳에서 비시 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을 남부 알제리와 모로코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시켰고 드골 지지자, [[시온의정서|프리메이슨,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 특히 그는 유대인에 대한 비시 정부의 법률을 매우 가혹하게 적용했다. 1941년 9월 30일, 그는 5세에서 11세의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대인 학생들을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에서 몰아냈다. 페탱은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지만, 베이강은 자신이 고등교육에 관한 법률을 따랐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독일에 대해서도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는 소장 장교들이 독일에 대항하라는 권유에 솔깃해, 공식적으로는 독일군에 적대하지 않았지만 독일군에게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1941년 5월 28일 [[프랑수아 다를랑]] 프랑스 해군 제독이 서명한 파리 의정서에는 독일 해군이 튀니지, 세네갈, 알레포, 시리아 등 프랑스 해외 식민지에서 광범위한 군사 협력을 받을 수 있으며 군사 기지를 설치해도 좋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베이강은 이 조약을 "지나치게 굴욕적"이라며 독일 해군에 대한 협력을 거부했다. 또한 그는 나치 스파이들을 색출했고 그들을 잡는 대로 처벌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베이강의 태도에 불신을 품었다. 베이강이 트럭 및 군용 차량 1200여 대와 중포 1000여 발을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게 전달하는 등 협력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긴 했지만, 히틀러는 그를 믿을 수 없는 기회주의자라고 판단하고 비시 정부에게 베이강을 해임하라고 압박했다. 결국 베이강은 1941년 11월에 해고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 후인 1942년 11월, 그는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1945년 5월까지 모리스 가믈랭 장군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몇몇 정치인들과 함께 티롤 북부에 있는 이터 성채에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1945년 5월 [[이터성 전투]]를 통해 미군에게 구출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